금융협동조합의 출현

이 이야기는 헨리 던컨(Henry Duncan)이 남서부 스코틀랜드의 솔웨이(Solway)만 가장자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루스웰(Ruthwell)의 목사가 되었던 1798년에 시작된다.

그는 즉시 수많은 가난한 교구 주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여성들이 가정에서 섬유를 짤 수 있도록 아마(flax)를 구입하고, 남성들을 고용하여 표준 농장을 만들거나 옮겨 다니며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지역 친화형 사회를 회복시키고 곡물을 도매가에 수입하였다.

1810년에 교구 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지주 들은 기꺼이 그를 후원하였다.

지주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미래의 니즈에 대비하여 저축을 하게 되면 교구의 빈민구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를 좋아하였다.

던컨은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 3년간 리버풀에 있는 은행에서 근무하였으며, 사업경험과 자선활동을 위한 충동을 결합하였다.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사람들은 단지 6펜스로 저축 계좌를 만들 수 있었다. 예금은 5%의 이자를 주는 지역 상업은행에 맡겨졌고 저축자들은 4%의 이자를 받았다.

나머지 1%는 자선기금, 장기저축자에 대한 차등이자, 그리고 은행 관리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던컨은 스스로 그것을 운영했고 월급을 받는 대신에 마을 학교를 짓는데 돈을 사용하였다.

사업모델은 복제하기

첫 번째 은행이 문을 연지 5년 이내에 영국 전역에서 저축은행이생겨났다.

이듬해에는 유럽과 미국에까지 전파되었고, 현재 그들은 세계 은행시스템의 주요참가자들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모델에는 결점이 있었다.

그 모델은 소유자가 부재했으며, 정부규제가 적용되기 전까지는 그 모델을 손에 넣는 사람의 신용에 의해 관리되어 아주 안전하지는 못했다.

영국의 로치데일에서 실패를 경험한 후, 1848년에 사람들은 신설한 로치데일 선구자(Rochdale Pioneers) 소비자협동조합의 출자계좌에 예금을 하기 시작했다.

협동조합 운동은 노동자 계층을 위한 임시 저축은행이 되었으며 가장 혹독한 침체기에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노동자 계층은 나머지 19세기 동안에도 무서운 ‘빈민구제법(poor law)’에 의지하지 않고 빈곤에서 해방되었다.

소비자협동조합이 제공하지 않는 한 가지는 신용을 공여하는 것이었다. 1826년 영국 브리턴에서 시작된 이전 협동조합운동은 침체기에 조합원에게 신용을 공여하였으나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산적 활동을 위한 신용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했던 소비자 신용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 당시 영국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임금노동에 의지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농노제도가 철폐되고 점점 더 시장 시스템에 의지하는 독립적인 새로운 농민계층이 형성되었다.

도시에서 산업화가 느리다는 것은 길드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는 장인 사업이 여전히 우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농부와장인들은 정말로 신용이 필요하였다

조치의 촉매제

유럽을 동요시켰지만 귀족 통치자를 몰아내지는 못한 1848년의 자유 혁명과 함께 1846년에서 1847까지 이어진 극심한 기근이었다.

헤르만 슐체(HermannSchulze)는그의 고향인 델리치의 법률 공무원이었다. 1848년 혁명동안에 그는 프루시안 국회의원(PrussianNational Assembly)으로 선출되었다

노동자와 장인계층의 환경에 대해 조사하는 위원회를 통솔하였다. 도시의 상인과 수공업자의 곤경에 대해 주목하고, 사람들의 질병을 보장하는 공제조합(共濟組合, friendly society)과 신발 제조업자에게 원재료를 제공하기 위한 협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1850년에 그의 첫 번째 신용협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부유한 창립멤버들의 자본공급에 의지하였는데, 모두 장인들이었던 10명의 조합원이었으며, 그래서 그 형태는 자선조합과 협동조합의 혼합체였다.

동시에 그의 동료였던 안톤 베른하르디(Anton Bernhardi)박사는 근처 도시인 아일린부르크(Eilenburg)에 예금자와 대출자가 소유하는 은행을 설립하였고, 1852년에 슐체는 그의 은행을 조합원이 소유하도록 변경했다.

저축 및 신용 협동조합이 마침내 만들어진 것이다.레드리히 라이파이젠 역시 공무원으로 독일 극서부 지방의 라인(Rhine) 강기슭에 위치한 베스터발(Westerwald) 마을의 시장이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슐체가 경험한 것과는 달랐다. 평지와 넓은 밀 농장, 그리고 프루시아의 마을들 대신에 숲 그리고 작은 농지와 마을들이 있는 산악지역이었다.

1846년~1847년까지의 지독한 기근이 다시 한번 행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는 빵과 감자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밀가루를 도매로 사서 협동조합 빵집을 설립하였고 빵 가격을 절반으로 줄이는데 성공하였다.

또 그는 우리가 농산물 공급협동조합이라고 부르는 농민들 대상의 소 구매 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근본적인 고리대금 문제와 싸우기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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